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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의 시대에 손글씨를 쓰는 이유
바야흐로 타이핑의 시대다. 아니, 앞으로는 음성 입력이 더 발달할 테니, 사실상 타이핑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켈리그라피 등으로 손글씨를 즐기고 있다. 나 역시도 손글씨를 쓰고 있다. 다만, 멋진 켈리그라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펜으로 문장을 옮기기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뮤지컬을 보다가, 연극을 보다가 등등등 어떤 행위를 하다가 만난 멋진 문장들을 기록한다는 이야기다. 스마트폰을 쓰면 되지 않냐고? 물론 빠른 저장을 위해 스마트폰도 활용한다. 하지만 손으로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 글자 한 글자 적으며, 하나의 문장을 손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라 좋은 것이 아니다. 좋은 문장을 천천히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며, 글자 하나와 문장 하나 그리고 문단 하나를 눈과 손으로 새기며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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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당신이 빽빽이 혹은 깜지를 떠올린다면, "감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즐기기 위해 쓰는 손글씨는 목적도 없이 '쓰기 위해 쓰는 행동'과 차원이 다르다.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 가사를 손으로 쓰다 보면, 멜로디가 글자마다 입혀진다. 좋아하는 연극 대사를 손으로 쓰다 보면, 무대가 글자 속으로 들어가 있다. 마음에 든 시나 소설의 한 구절을 적다 보면, 단어와 문장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프로기억상실러인 나에게는 이러한 손글씨는 나의 즐거웠던 순간을 재생하는 동시에,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조금 더 잘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사랑스런 라미 만년필과 함께 글을 쓴다.
왜 하필 만년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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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그라피용 만년필을 사용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필기감이 볼펜보다 좋았다. 힘을 주지 않고 스르륵 미끄러지는, 이토록 부드러운 느낌이라니! 언제나 힘을 꽉쥐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문명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뗀석기와 간석기만 사용하던 인간이 청동기를 만난 느낌이랄까?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사실 만년필이라는 도구가 멋져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분명히 미디어에 의해 생겼을 일종의 고정관념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1900년대 초반의 동서양의 여러 작가가 만년필을 쥐고 머리를 싸매며 온갖 작품들을 써 내려가는 환상이 박혀있는 것을!
그리고 우아하게 생긴 고급 만년필을 보고 있노라면, 펜대를 쥘 때의 마음가짐조차 다를 것 같았다. (몇천원이면 살 수 있는 볼펜보다는, 가격 때문에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만년필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어깨의 힘 빼기는 핑계고, 그냥 멋있으니까!
초보자의 만년필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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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의 ㅁ자도 모르는 초보자는 일단 네이버에 만년필을 검색한 후, 가장 저렴한 만년필을 선택했다. 그 초저렴 만년필의 브랜드를 따로 검색해서, 괜찮은지 아닌지 리뷰를 보긴 했다. 하지만 대륙의 만년필 후기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제 '치고' 좋은 것, 싼 가격 '치고' 나쁘지 않은 것은 고르면 안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놓쳤다. 디자인이 누가 봐도 만년필처럼 생긴 것이, 무척이나 예뻤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봐도 겉모양은 예쁘다. 응. 정말 예쁘다. (같은 소리를 3번쯤 반복한다는 건 진짜 진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만년필로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쓰기 어렵고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간 뻣뻣한 필기감, 펜촉이 종이를 긁는 느낌, 잉크가 가끔 버벅거리는 일들 모두 내가 서투르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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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라미 만년필을 접한 순간, 이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 '도구' 탓임을 깨달았다. 내가 라미라는 브랜드를 처음 접한 것은 코엑스의 라미 매장이었을 것이다. 추측으로 끝나는 이유는 '라미'라는 브랜드를 처음 인지한 순간은 스타벅스 덕분이지, 브랜드 매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다이어리에는 관심도 없는데, 내게 스타벅스 리워드 제품을 인지하게 만든 스타벅스는 정말 대단하다. 음.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네. 여하튼 라미는 전체적인 비주얼이 대륙산만큼 예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경험을 위해 추가로 구매한 것이다 -라는 건 당연히 핑계다. 예쁜 컬러의 잉크를 사용해보기 위해, 추가로 만년필 하나를 구매하는 김에 독일제로 구매했다. 대륙산보다 조금 더 가격이 나갔지만, 기본 10만원대 이상인 만년필 브랜드들을 생각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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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를 하지는 않고 만난 라미 만년필로 첫 필기를 했을 때, 나는 부드러움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그리고 대륙이 선사한 장렬한 뒤통수에 맞아 정신이 얼얼해졌다. 장인은 도구 탓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장인은 아니지만 이건 백번 천번 생각해도 도구 탓이다. 라미는 부드러운 필기감과 종이 위로 그리는 느낌,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잉크로 대륙의 초저렴 만년필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증명해주었다. 대륙 만년필의 고가 라인은 안 써봤고 안 쓸 예정이라 모르지만, 좀 다를 수도 있다. (그래도 고가니까?) 하지만 이왕 쓰는 돈, 파카든, 파버 카스텔이든, 몽블랑이든 유명하고 증명된 브랜드에 투자하자. 성격상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이해해달라. 암튼 라미는 저가 라인도 촉의 굵기를 선택할 수 있어 좋다. 초보자는 굵은 촉을 쓰는 것이 나은데, 펜의 각도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잘 써지기 때문이다. 펜글씨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쓰기 어려운 걸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만 볼 글, 펜이 잘 써져서 쓰는 맛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손으로 쓰는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
뭐든 쓰라. 일단 한 번 써보면, 쓰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있어 보이게 유명한 시의 한 구절이나, 소설의 한 문장, 혹은 유명한 뮤지컬 넘버를 적어보아도 좋다.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쓰거나,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대사를 적어보아도 좋다.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이든, 일단 쓰라. 나는 주로 내가 관람한 연극의 대사와 시를 적는 편이다. SNS에서 이미지화된 소설/시의 한 구절을 저장해두었다가, 만년필로 옮겨 적기도 한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가나다 쓰기와 ABC 쓰기도 한 적이 있다. 정말 무용하지만, 생각을 비우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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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기고자 하는 것은 멋진 펜글씨도 아니요, 켈리그라피도 아니며, 그저 손으로 쓰는 즐거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혹은 잡스러운 -이라 쓰고 멍멍 같은 일들이라 읽는 - 사건이나 생각들을 머리 속에서 치워 버리면서,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들로 안구와 머릿속을 정화할 수 있는 시간도 포함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만년필로 어떤 단어나 문장의 운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시간도 가질 줄 아는 여유 있는 삶을 살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어떠한 거슬림 없이 써지는 펜이 중요하고, 만년필은 그런 점에서 최고의 도구이며, 라미 만년필은 글씨를 쓸 때 도구 탓하지 않게 도와주는 최고의 만년필이다. 각인도 해주는데, 각인까지 하면 쓰는 맛이 업그레이드되니 참고하시길.
좋은 것들을 수집합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리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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